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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05

온실의 꽃



올해도 이 시기가 돌아왔군요. 학술회 시즌입니다. 신입 분들을 위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2인 1조, 3팀을 이루어서 학술교류 목적으로 타 기관에 파견되는 거에요.
"간단하게 말하면 그냥."
출장이죠.
"몸은 힘들고 보너스는 없는 출장요."
저렇게 말하는 부소장도 이번 멤버 중 한 명이에요. 일정이 꽤 빠듯하다 보니 다들 피하는 자리가 돼놔서. 상급자 세 명과 신입 세 명이 가게 되어 있거든요.
헤. 재밌을 것 같은데.
"저도 처음엔 그랬죠. 3년 연속으로 갔을 때는 병가 내려고 설사약 먹었어요. 신입이 들어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네."
네. 저런 선배는 되지 맙시다.
올해의 대상 기관은 로스앤젤레스, 와이오밍, 매사추세츠입니다.
"저 로스앤젤레스 희망합니다."
"양심이 없는 분이시네."
그래도 올해는 비교적 가까운 곳들이잖아요. 로스앤젤레스는 제가 가고요.
"권력 남용 아닌가요, 소장님?"
여러분 휴가 가셨을 때 제가 플로리다까지 날아가서 일하고 온 것 잊지 않으셨죠?
"어흠, 큼."
와이오밍은 6시간, 매사추세츠는 8시간이네요.
"차편으로는요?"
대략 17시간, 45시간... ...
"케헥."
"그리고 LA는 달랑 1시간 반 거리고요."
좋네요. 이 맛에 소장하죠.
"원래 저런 분 아니셨는데 변했어..."
*웃음 소리*
"우리의 프레쉬맨은... 샌즈 씨네. 어, 비행기 타본 적 있어요?"
어... 아뇨.
"탈 수 있으신가?"
이젠 합법이긴 한데.
"매사추세츠 제가 지원해도 될까요?"
"거기 네 모교랬지?"
"신입의 패기에 박수!"
그럼 남은 건 와이오밍, LA.
"전 어디든 좋아요."
저도요. 갈 수 있기만 하다면야?
"나도 저런 말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부소장님은 저랑 매사추세츠 가요! 관광시켜 드릴게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흐하하."
그럼 신입 두 명은 제비뽑기로 합시다. 펜 좀.
"샌즈 씨 먼저 하세요. 저는 운명에 따를게요."
"저, 저 운명론자."
골라요. 어느 손?
그러면... 이쪽.
"펼쳐 봐요!"
LA네요.
프리스크가 제비를 쥐었던 손을 거둔다. 뒤에서 웃으며 손뼉을 친다. 떠들썩한 분위기와 빔 프로젝터의 역광 속에 나머지 흰 소매가 사라졌다.
나랑 같이 가겠네. 샌즈.
나는 무심코 끄덕이고 말았다.



정말 짐이 그게 다야?
왜? 챙길 거 다 챙겼는데?
책 몇 권 뿐이잖아.
어디 여행 가본 적이 없어서. 이거면 충분하겠지 뭐.
가면 읽을 시간 없을걸.
유경험자의 조언이라... 그럼 뭐가 필요하려나.
하다못해 속옷 같은... ...
헤.
아니다.
너 지금 해골이 속옷을 입을까 안 입을까 생각하고 있지?
실례했습니다.
궁금할 수도 있지, 뭐. 많이들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넌 누가 '실례지만 지금 팬티 입고 계세요?'라고 하면 뭐라고 할래?
미안.



요새 자주 온다.
음. 뭐, 파피루스도 보고...
신경 써줘서 고맙긴 한데 굳이 안 그래도 돼.
어떤 걸?
난 괜찮아. 그리고 칼라는 나보다 너랑...
친해지는 데 시간이 중요하진 않지.
...
그날 퇴근하기 전에 이야기를 나눴는데.
응.
너랑 있는 시간이 즐거웠대.
그래.
다행이다.



이제 가?
응.
이거 토리한테 갖다 주고.
엄마 좋아하시겠네.
너 말이야. 혹시...
음?
......아니다. 됐어.
응.
고마워. 내일 데리러 올게.
그래... 잘 자라.



나는 대부분의 선택을 할 때 혹시 이게 틀린 길일까 고민한 적 없었다. 그런 감각은 진작 잊어버렸다. 잃었나?
이렇게 했어야 했을까? 저렇게 했어야 했을까? 그렇다면 그렇게 하자. 내가 죽인 자들을 살려내고 그 손에 쓰다듬 받자고. 이렇게 쓰라고 준 힘 아니었어? 과연 누가? 누가 줬든 간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한 번도 의심을 품지 않았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내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을 전부 다 했다. 후회하거나 구걸하거나 잘못을 말하거나 용서를 기다리는 짓들. 아마 앞으로는 더 하겠지.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너는 의심해도 된다. 당연하지. 라이터 불꽃처럼 아주 작게 오르는 생각들. 나는 네 주위 불붙을 만한 것들을 모조리 치워 두겠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 남아, 모든 것을 예전 그대로 만들어 가겠다.
이 시간이 지나면 내 것이 되리라.



수고 많았어. 생각보다 더 힘들었지?
어, 너도. 그렇긴 하네.
피곤해 보인다.
피곤은 무슨...
말끝을 흐렸다. 더 대답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TV에서나 보던 괴물을 처음 마주한 사람들이 던지는 시선은 얼마나 노골적인가. 수많은 무례를 웃어넘길 수 있는 것은 그가 인간보다 배로 성숙해서다. 혹은 익숙해졌던가.
세미나실을 벗어나자 가운 아래에 숨겨 두었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인간이란. 인간의 차별이란 이런 것. 온갖 인간들이 스쳐 지나가는 대도시는 노골적인 차별 덩어리였다.
관람 프로그램 좋더라. 아무래도 규모가 이만하니. 우리도 참고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오늘 세미나도 DB에 올라올 거야.
이제 뭐 남았지?
일정은 끝났고... 이제 자유시간. 내일은 1시 이후에 출석.
오. 넉넉하네.
저녁 먹으러 갈래?
아까 먹었잖아?
제대로 먹지도 않았으면서.
어어. 입에 좀 안 맞더라고.
케첩도 안 뿌리고...
heh. 괜찮아. 그냥 별로 안 당겨서 그래. 그것보다...
으쓱하며 살짝 웃는다. 역시 쉬는 편이 좋을까 생각했으나 입을 떼기 전에 그가 천장을 가리켰다.
나 망원경 좀 더 봐도 되나?
나는 웃어버렸다.
그럼. 당연하지.



무슨 별이 보여?
오리온 성운.
있잖아, 여기 들른 사람이 천 이백만 명이래.
많구나.
... ...
우리도 열심히 해야겠네.
네가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 하늘의 별을 보던 눈이 내 눈에 응하자 과거가. 바로 여기 다시 반복된 것 같았고 나는 한번 더 웃었다. 응.
나도 힘낼게.



싱글 침대 두 개가 딸린 적당한 크기의 객실. 우리는 잔뜩 사 온 맥주캔과 안주를 늘어놓았다. 나초, 프렌치 프라이, 피자 몇 조각. 가운을 옷걸이에 제대로 걸지도 않고 테이블 의자를 빼고 앉는다.
이봐요, 아저씨. 여기는 옷 걸어주는 사람 없는데.
대충 놔, 대충. 이제야 속이 출출하네.
맥주가 고픈 게 아니고?
알면 빨리 앉기나 해.
캔을 따는 경쾌한 소리. 건배하자마자 반을 비웠다. 조금 들떴고 조금 피곤했고, 그를 먼저 재우고 싶었다.
너랑 제대로 술 마시는 거 처음인가?
그럴걸... 누가 그동안 꼬맹이랑 안 놀아줘서.
왜. 지금은 소장님 대접 해주잖아. 존댓말 필요해?
흠. 아니.
소장님. 이것 좀 드셔보시죠. 생 케첩은 최고의 맥주 안주랍니다.
아, 정말. 내가 잘못했어.
*낄낄*
나 요즘 집 알아보고 있는데.
어, 이사 가려고?
독립하려고.
독립?
언제까지고 엄마한테 의지할 수는 없지.
허어... ...어디로 갈 건데?
멀리는 아니고. 공원 근처에 공사하고 있는 집 알아?
공원 근처... 본 것 같기도 하고...
정원 딸린 2층 집으로 가게.
혼자 살기엔 너무 크지 않나? 같이 지낼 사람이라도 있어?
아직은 없지만.
언젠가는 생기겠지.
남향이고. 서재도 있고... 2층 다락방은 슬라이드 시공을 해서 옆으로 열리게 하려고.
이야. 멋지네. 하긴 너도 정착할 때가 됐지.
내일 망원경 사러 갈 건데 같이 가줄래?
망원경? 천문대에 큰 거 있잖아?
그건 내 거 아니니까.
매일 보면서 질리지도 않냐. 참.
너도 그렇잖아.
그래, 그럼. 나도 가끔 구경시켜 주고.
너도 좋아할 거야.



너 진짜 그걸 사게?
카드요. 일시불로.
2만 달러... 거기다 풀옵션이면 대체 얼마야...
꼭 가지고 싶었거든. 이것 때문에 일부러 다락방 있는 집을 골랐어.
하여튼 좋겠다. 역시 소장을 그냥 하는 게 아니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이사하면 보러 올래?
기스날까 봐 무서워서 보겠냐?
괜찮아. 보다시피 돈 많잖아.
얘 봐라...
농담이야.
이제 집에 가자.



다녀왔습니다.
토리. 맡아줘서 고마워.
"어서 오렴. 늦게까지 힘들었지?"
"샌즈! 왔구나! 출장 어땠어?"
어어, 정신 없었어. 눈 깜빡하니까 끝났지 뭐야.
"제대로 일하고 온 거 맞아? 또 어디서 자기만 한 건-"
글쎄... 말했잖아. 눈만 깜빡했다고. *윙크*
"샌즈!!!"
즐거우셨나 보네요. 아직도 빵 냄새가 나네.
"요즘 같이 식사하는 일이 적었잖니. 아주 활기차고 좋았어."
"그리고 내가 애도 아니고 말야. 혼자서도 집 볼 수 있다고!"
그래도 토리 음식은 맛있었잖아?
"그야... 정말 최고지!!! 내 샌드위치 테두리도 잘라 주셨다니까!"
"어머, 어머."
하하.
차로 데려다줄까?
됐어. 몇 걸음 안 되는데.
그럼 조심히 가. 파피루스도.
"잘 자, 프리스크!"



뭐 먹었어?
"따뜻한 우유랑, 쿠키랑, 스튜랑 고기 파이랑..."
와우. 좋았겠다. 따로 고맙다고 전해드려야겠네.
"그래서 말인데, 여왕님... 아니 토리엘하고 깜짝 파티를 하기로 했어!"
그래? 무슨 깜짝 파티?
"여기 사람들이 우리한테 잘 해줬잖아. 이웃들을 집에 초대해서 다 같이 노는 거야. 그리고 샌즈한테..."
나한테?
"... 어... 잠깐. 이건 깜짝 파티라고! 다 알려주면 깜짝 파티가 아니잖아!"
뭐지?
뭐, 그래. 깜짝 놀랄 준비 하고 있을게.



내일은 오랜만에 저녁 같이 드실래요?
"시간이 되니? 잘 됐네. 파피루스가 파티를 열고 싶다는구나."
파티인가... 제가 뭘 도우면 될까요?
"도울 일은 따로 없을 거야. 깜짝 놀랄 준비만 하렴."
네?
"그 아이도 참 귀엽지. 후후..."
뭐지?



"샌즈! 여기서 뭐하고 있어. 좀 있으면 시작하는데!"
어. 요리 도와줬더니 좀 피곤해서.
"도와주긴 무슨! 계속 옆에서 집어먹기만 했잖아!"
맛보기도 중요한 요리 과정이야, bro.
"손님 자리에 방귀 쿠션 놓은 거 아니지?"
어.
"케첩 뚜껑 풀어놓은 거 아니지?"
어어.
"진짜로, 샌즈."
어어어.
"오늘은 진짜 중요한 파티란 말이야. 사라지지 말고, 장난치지 마."
아알았어. 걱정 말고 친구들 보고 와.
방금 장난 안 친다고 하지 않았어?
손님들한테 안 친다고 했지.
이것 좀 봐, 이런 건 대체 어디서 파는 거람.
heh heh heh.
깜짝 파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주인공은 아직인가 보네.
그러게. 파피루스식 파티를 받다니 행운아지 뭐야.



토리엘의 힘이 잔뜩 들어간 멋진 음식들. 파피루스의 스파게티는 테이블 한가운데에 있다. 샌즈 자리 바로 앞의 접시 몇 가지는 내가 준비한 것이다. 알자스식 고기 요리, 구운 채소와 버섯 파테. 인사를 나누고 각자 잔을 들었다. 비상식적으로 평화로운 이 자리가 최후의 만찬 같기도 했다.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 저녁.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며 이를 행하리라.
"어흠, 이웃 여러분. 다들 파피루스의 스파게티-파티에 와줘서 고마워. 가운데에 있는 내 신작이 오늘 메인 요리야!!! 마음껏 먹어!! 스프링클도 뿌려놨어."
파피루스가 칼라 진을 찾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전근을 갔다고 말했으니 뭐라 의심할 것도 없지만 엽서나 편지를 보낸다고 주소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지금도 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는 얼마나 행복해 보이니.
"얼른 맛보고 싶겠지만 그전에 내 특별한 친구를 소개할게. 아니, 너희들 모두 특별한 친구들이지!!!" "아하하, 괜찮아. 파피루스."
샌즈는 파피루스의 옆, 내 맞은편 자리에서 케첩 뚜껑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모인 자리가 즐겁기는 한 모양이지. 느긋한 표정이다.
"이쪽은... 내 '데이트 상대'야."
뭐?
파피루스가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애인이라고?
인간이었다.
놀랐으나 다시. 샌즈를 보았다. 케첩 뚜껑이 툭 떨어진다. 너의 그런 표정을 얼마 만에 마주하는가, 샌즈, 그러나 그 시선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짧은 소개가 끝나자 다들 축하의 말을 한 마디씩 던지는데, 내 차례에 어떤 표정으로 무엇을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잘 어울려. 좋은 인연 오래 이어갔으면 좋겠네요.'
나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고 그는 내가 자신을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금세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동생과 애인에게 시덥잖은 농담을 던졌다. 질색하는 동생과 축하하는 형. 모두가 웃고 손뼉을 친다.
그리고 나는?



거실 쪽이 시끌벅적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소파에 누워 있자니 프리스크가 머그를 들고 다가왔다.
괜찮아?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잔이 놓인다. 소파 위로 지는 그림자에 그만 눈을 감을 뻔했다.
그래, 너는 알고 있구나.
담배 피우러 갈까.
...그럴까.



샌즈의 담배갑에서 자연스레 하나를 가져가 입에 물었다. 여전한 취향. 먼저 담뱃불을 붙여 주자 고맙다는 듯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높고 행복한 목소리들이 집 안에서 들린다. 우리 둘이 없더라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아.
금연이라며.
어렵더라.
그렇지. 어렵지.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몇 마디 고민을 하다 그만두었다. 파피루스가 애인이 생기는 시간마다 크게 충격을 받았으니까. '그냥 애인이잖아'. 그 순간이 짜릿하기도 비참하기도 했다.
불안감이 가슴을 내리누른다. 호흡으로 들어가는 연기들은 어떤 진정도 주지 못했다. 왜? 무엇이? 이전 삶에서는 내가 샌즈의 많은 시간을 차지했기 때문에 파피루스에게 애인이 생긴 것이라 생각했다. 파피루스의 죽음에는 그 요소가 끼어 있었고, 통제할 것이 하나 더 느는 것은 사양이기에 틈 날 때마다 파피루스를 돌보았다. 같이 있는 시간을 만들고 샌즈가 동생 곁을 떠나지 않도록.
출장을 가기 전에 토리엘에게 동생을 부탁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파피루스는 샌즈의 소중한 끈으로서, 아직은 그의 곁에 있는 것이 내 의도였다.
이 시기의 파피루스에게 특별한 존재가 생기는 것은 절대적인 운명은 아니다. 확률은 반보다 낮았다. 혹은 그전에 내가 그를 죽였거나 세상을 재구성했거나 했다. '파피루스의 애인' 요소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지금은 무언가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든다.
아.
내 손을 잡았다.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하얀 옆모습이 담배를 빨아들이고 연기를 내쉬기만 한다. 무의식인가? 무의식이라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손을 살짝 떨었다.
!
네가 그제서야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는데, 나는 손바닥을 뒤집어 그 손을 쥐었다. 잡힌 것은 너인데도 내가 사슬로 묶인 것 같다. 몸이 순식간에 무거워졌고 꿈처럼, 거짓말처럼 작은 몸을 꽉 안았다. 죄인처럼.
프...
가려움이 손바닥부터 온몸으로 퍼진다. 심장이 손바닥에서 뛰는 것 같다. 담배 냄새와 손길과 이 익숙한 온도 같은 것들. 이 여름 한낮. 따스한 분위기와 잔디 위에서 돌아가는 스프링쿨러 같은 것들. 나는 어떻게 해야 해?
......미안. 웃기는 형이지.
들이쉼. 내쉼. 연기. 냄새. 햇살. 떨어지는 재.
네가 나에게 틈을 보이는 것은 언제나 네 동생의 일 뿐. 알고 있지만 또다시 이렇게 확인하고 그래도 나는 좋아, 황홀하고 황홀해서 이 순간 나를 칭찬하고 싶다 품에 조용히 안겨 있는 너를 내가 만들었다고, 내가 만들었다고.
아니.
불길한 것이 있고 좋은 것이 있다. 좋은 것들로 집을 지어도 불길한 바람이 불면 끝이다. 잿더미까지 흩어지면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나는 또다시 총을 들어야 하겠지만, 내가 여기까지 왔고 네가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네가 내 손을 잡았고 내 품에 안겨 있는데...
... ...누구한테든 널 내어줄까보냐.


손가락 뼈가 뺨까지 내려온 식은땀을 닦아 주었고 나는 얇은 티만 걸친 어깨를 쥐었다. 들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져 짓밟아 눌렀다. 목이 꺾여 죽었다.



나는 샌즈와 오랫동안 살아남은 꿈을 꿨다. 나는 흰 머리가 날 때까지 온실을 가꾸고 있었다. 꽃가위에 손가락이 베이면 샌즈가 약상자를 들고 와 다정하게 상처를 감아주었다. 내 손가락 열 개는 언제나 흉터 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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