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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04

온실의 꽃



방과후 수학 3분기 지도안... 학부모 공개수업안...
답안지를 어디 뒀더라...
방 구석의 꽃다발이 눈에 들어온다.
거꾸로 매달린 꽃들이 이젠 거의 다 말랐다.
'리시안셔스, 보라 장미. 똑똑하니까 까먹지 않겠지. 다음에 물어볼게.'
꽃말은 번지르르해도 꽃의 운명이란 똑같다. 억지로 주어져서 애매하게 죽는다. 그냥 버리지도 물병에 꽂아주지도 못하고 말라비틀어지게 두는 게 나다. 잎이 다 부서져 먼지가 될 때까지.
그리고 그때마다 새 꽃을 안기는 게 너다.
방에 들어설 때마다 반기는 꽃향기가 어색하지 않게 된지 오래.
...
질식할 것 같다.



뭐해
아.
보내자마자 확인을...
네 생각
데리러 올 수 있나. 바쁘면 말고
갈게
학교지? 금방 갈게
그 카시트는 좀 빼줬으면 한다만.



숙제 꼭 하고. 잘 가라, 얘들아.
됐다... 후회해서 뭐 해.



샌즈.
heya. 차 좋네.
고마워. 집으로 모실까?
부탁할게. 애들 보느라 머리가 영 뻑적지근해서.
*윙크*
*웃음*
키스하자고?
벌써 사인 잊어버렸어? 섭섭한데.
아,
... ...샌즈, 나 설레는데 어쩌지.
왜 그래. 처음도 아니면서. 숙여 봐.
...*쪽*
자.
... ...샌즈,
오늘 왜 그래?
쉬는 시간 줬잖아. 보답이야. 출발하자.
응... 가자. 저녁은?
가서 해줘. 오늘 팝 없어.
네가 저녁 해달라는 거 처음인 것 같은데.
*으쓱*
뭐, 아니면 사먹고 들어갈까?
아니, 아니. 좋아. 만들어줄게.
먹고 싶은 거 있냐고 물어봤자 스파게티나 햄버거겠지. 냉장고에 뭐가 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장 봐올걸. 생베이컨, 세이지, 통조림 올리브...
너는 항상 모르겠다. 다 아는데 모르겠고. 재밌고. 두근거리고.



파피루스를 위해 고른 부엌 넓은 집이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저 앞치마는 또 언제 갖다놓은 거야?
비싼 향신료. 와플 기계. 식칼 세트. 직접 만든 복숭아 프리저브. 검은 허리앞치마. 테이블 위의 파란 수국이 마음을 간지럽힌다. 베이컨 굽는 냄새가 난다. 시계 없는 부엌에서 손끝으로 초, 분, 시간을 쉼 없이 헤아리며 식사를 기다렸다. 이 망할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그새 실력이 좀 는 것 같은데.
넌 오늘 적극적이네.
아니... 정말로. 다른 해골이랑 해보기라도 한 거야? 농담이지만.
우리는 계산을 잘 했다. 상대의 의중을 들여다보고 적절히 대답하는 법도 알았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건 그런 거다. 그런데도 한 번 말해보는 건 그저 심술이거나 화풀이거나. 웃음이 났다.
그런 건 내가 묻고 싶은데. 조금 더 이쪽으로, 샌즈.
지금도 가깝잖... 윽, 아, 잠깐만. 이건 혹사라고...
네 목이 좋아, 겨울엔, 빨리 여름이 됐으면 했지.
남의 목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개도 아니고... 살살 좀 해줘.
머리칼 사이로 파고드는 가느다란 것들. 당신 손가락이 마디마디...
으음.<
개 취급도 좋아. 칭찬만 확실하게 해준다면야.
heh... 재밌는 농담이네. 꼬맹이. 넌 인간이잖아. 쓰다듬겨도 별로 안 좋을걸.
그건 모르는 일이지... 쓰다듬어 줄래? 그 손으로.
...이 손으로 쓰다듬어 달라고? 정말로?
빨리.
... ...
눈...
자, 만족해?
옷 걷어도 돼?
일일이 안 물어도 돼. 하고 싶으면 그냥...
기다리고 있잖아. 내가.
그만 좀 해.
...알았어. 해.
내가 너무 조심스러웠나. 하긴 우린,
...한 손에 들어오네. 너무 좋다.
흐, 읏...
강제였던 적 밖에 없었지. 네 척추를 손 안에서 하나하나 쓰다듬는 짓.
널 안으면서 이전의 너를 떠올린 내가 쓰레기일까?
상관 없다. 이렇게 예뻐서.
...우리 방으로 들어갈까?
대답은 필요 없었다.



불 켜놓는 거 싫어?
싫어.



내 침대. 내 이불. 내 베개에 누워 천장을 보는 얼굴. 거절을 들었고 웃음이 나왔다. 양심이란 것은 네가 없앴을 텐데도 나의 감정적인 부분은 너만 건드릴 수 있다. 웃기지. 이제 와서 쓰레기인지 아닌지가 뭐가 중요해. 여기까지 와서.
중요한 건 네 의지로 내게 안긴 거야. 그게 사실은 네 뜻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많은 생각을 했고, 할 것이고, 수천 번 포기와 체념과 기대를 반복하면서 내게 몸을 맡기는 거, 모를 줄 알았니.
언젠가 그 기대와 두려움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게 만들어줄 테다. 내 사랑.
눈, 눈, 눈, 눈. 저 놈의 눈.
이제 알겠다. 난 저 눈을 본 적이 있어. 이 끔찍한 기시감. 그리고 저게 아주, 아주...
기다린다고? 선택하라고? 이런 게 정말 내 선택이라고 생각해? 나는 모르겠어. 이게 두려움인지 혼란인지 다른 무엇인지.
지금 무슨 생각하냐고 묻고 싶다. 알 것 같지만 묻고 싶다. 너는 거짓말을 할까? 내게 거짓말할까? 나는 네 생각을 한다. 너도 마찬가지겠지. 그것만은 진실하다. 그래서 내가 섹스를 좋아해. 너와 나뿐이잖아.
입 밖으로 내면 모조리 무너진다. 너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공든 탑이다. 그래서 예뻐, 예뻐, 혀 아래로 넘실대는 말들을 매번 삼키고 참고 이거 참 재밌지, 나는 네가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 또 눈을 뜬다.
...하지 마...
네가 원하면 뭐든.



"샌즈! 또 늦잠이야! 일어나!"
피곤해...
굿모닝, bro.
"벌써 점심이거든! 하여튼 내가 없으면 꼭... 일어나라니까!"
미안. 나이를 먹으니 뼈마디가 쑤시네. 촬영은 잘 갔다 왔어?
"녜헤헤, 그야 끝내줬지! 내가 얼마나 빛났는지 상상도 못 할걸! '파피루스, 최고의 패션 해골'. 인간들이 나한테 또 다른 타이틀을 줬어. 이 몸의 숨길 수 없는 끼란..."
멋지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카메라 렌즈도 네 쿨함을 알아보는 모양이지.
"아, 근데 부엌에 차린 건 뭐야? 형은 아닐 거고. 누가 왔다 갔어?"
어...... 꼬맹이가. 아침에 잠깐.
"세상에. 프리스크는 가게 때문에 바쁜데. 좀 본받아, 샌즈! 걘 항상 부지런하잖아!"
heh, 그러게...



볼 수 있는 꿈을 모두 본 다음부터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한 식탁에서 저녁을 먹고 좋은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같은 시간을 공유하는 친애하는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다.
죽고 죽이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울고 달래고 안심시키고 약속하고 배신하고 죽고 죽이고, 반복하는 모든 시간에서 유일하게 특별한 것이 없었다면 진작 세상의 끝을 보았을 테다.
아무도 없는 세계에서 나를 재로 이루어진 백사장에 묻고 내 몸에 피는 구더기를 하나 둘 씩 세어 죽을 만큼만 죽지 않을 만큼만, 그게 가장 재미있는 일이 되었을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시간을 더듬어 올라가면 무슨 짓을 하고 누구를 죽이든 몇 명을 죽이든 몇 명을 배신하든 마지막엔 너를 보러 갔던 것 같다. 너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야. 내 죄를 모두 알고 있는 너의 경멸이 너무 좋았어. 그래. 그게 너를 괴롭게 하는 것을 알고도 그랬다.
너만이 다르다는 그 생각이 사랑으로 바뀌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것이 착각이라 해도 상관없다. 다른 선택지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너만이 전부였기 때문에, 내가 나로 있으려면 널 붙잡아야 했던 거야. 네 눈을 봐야 했던 거야.
나는 똑같은 일을 저지를 거다. 네가 착각하게 만들어준다고 했어. 다른 선택지는 어디에도 없고 나만이 세계의 전부라서, 네가 너로 있으려면 나를 붙잡아야 하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나의 절망 그 세계의 끝 내가 느꼈던 것들 그럴 리 없다고 눈물이 줄줄 나는데 머릿속에는 너밖에 없어서 구역질이 나고 내가 너를 사랑하고 마침내 너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 바로 그 때, 나는 내장과 고동치는 심장, 뼈의 그림자, 모든 걸 내걸고 네 영혼에 입 맞추는 끝을 부를 것이다.
샌즈. 내가 널 사랑한다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아.
요즘에는 네 꿈을 꿔. 이게, 사랑이겠지.
그대는 꿈도 꾸지 말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 생각만 하기를.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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